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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이동 민간인 희생자 첫 공식 발굴
국방부 “국군 전사자 아냐” 2017년 중단
노출됐다가 다시 묻힌 유골 부식 더 빨라
국방부 “국군 전사자 아냐” 2017년 중단
노출됐다가 다시 묻힌 유골 부식 더 빨라
상자 속에 할머니, 10살 안 된 아이 유해
애초 우이동 유해의 존재는 6년 전인 2017년 11월16일 처음 발견됐다.
당시 강북구 인수천 옹벽공사를 하다가 유골을 발견한 노동자들의 신고로 강북경찰서 과학수사대가 확인에 나서 유골 5~6구와 신발, 탄클립 등을 발굴했다.
국군 전사자 유골로 오인한 경찰은 현장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넘겼다.
이후 그해 12월6일까지 발굴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 유골 및 유품이 추가로 나왔고, 국방부는 민간인 희생자로 추정하고 발굴을 중단했다.
6·25 전사자발굴법상 군이 민간인 유해를 발굴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였다.
국방부로부터 다시 현장을 넘겨 받은 강북경찰서는 이후 행정안전부 과거사지원단 및 강북구청과 협의해 현장 보존을 위한 부직포를 설치하고, 흙으로 현장을 덮어뒀다.
경찰이 ‘우연히’ 발굴·수습한 유해 5~6구는 감식을 거쳐 현재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이번에 나온 유해까지 합치면 우이동 338번지에서 발굴된 유해 수만 15~16구가 된다.
서울서 군경에 의해 숨진 민간인 희생자 5천여명
발굴 용역을 맡은 삼한문화재연구원의 하영중 책임조사원은
“발굴지 면적 70㎡에서 나온 뼛조각은 200점으로, 허벅지뼈가 가장 많았고 머리뼈는 5~6개가 조각난 채로 나왔다”면서 “어린이 유해 3구와 상자 속에 담겨있던 틀니와 함께 나온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고 말했다. 나무상자에 담긴 2구는 6년 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작업하다 덮어놓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강북경찰서 현장 감식 결과, 1950년 10월께 국군 지휘를 받는 대한청년단원과 경찰이 인민군 주둔 시절 부역했거나 부역자 가족이라는 혐의로 우이동 희생자들을 집단학살한 것으로 파악됐다.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기 서울에서 군경에 의해 숨진 민간인 희생자만 5000여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부경대 산학협력단 보고서를 보면, 전국 유해매장 관련 조사대상지 381곳 중 서울은 ‘우이동 338번지’ 딱 한 곳이었다.
“트럭에 사람들 실어 와 사살하는 것 봤다”
이들은 누구일까. 전쟁 이전부터 우이동에서 산 원용봉(89)씨는 한겨레에 “중학교 1학년 때쯤인 1950년 10월께 경찰이 6.25 전쟁 이전 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내려와 살고 있는 제보자의 음악선생(당시 45~50살) 일가족 5명을 인수천 주변에서 사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유해 중 음악선생 부부와 장모, 7살 이내의 아들 2명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사건 당시 9살로, 우이동에 산 안상욱(82)씨도 한겨레에 “트럭에 사람들을 실어와 지금의 경전철 사무실이 있는 발굴현장에서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사살하는 장면을 몰래 목격하다가 발각되어 매도 맞고 어느 지하실에 저녁 늦게까지 갇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이동과 같이 유해 방치와 뒤늦은 발굴 등의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국군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는 기관이 원활히 협조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상시 독립부대로 돼 있지만, 민간인 유해발굴은 한시기구인 진실화해위 또는 유족회, 시민단체가 해왔다.
유해 발굴 전문가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한 번 노출됐다가 다시 묻힌 유해는 부식이 훨씬 빨리 진행된다”
며
“유해를 방치하지 않고 수습을 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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